석탑 아래에서 발견된 비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밝혀낸 통일신라의 정치 전략
― 사라진 사찰의 탑, 그 안에서 발견된 신문왕의 흔적
언뜻 보면, 평범한 시골 마을의 오래된 탑 하나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상상도 못했던 국가의 비밀과 역사의 단서가 숨어 있었습니다.
충청북도 충주시의 조용한 마을 한가운데,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사찰도 없이 홀로 서 있지만,
그 자체로 통일신라의 중앙집권을 상징하는 유산이자,
신문왕의 국정 철학이 새겨진 석비가 발견된 현장입니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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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국보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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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통일신라 8세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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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질: 화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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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정방형 기단 위에 7층으로 쌓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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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약 6.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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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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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 1962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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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석탑 아래에서 출토된 ‘충주 신라비’를 통해 통일신라의 지방 통치 체계를 밝힌 중요한 유산
절은 사라졌고, 탑만 남았다
이 탑은 원래 ‘중앙탑사’라는 사찰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오늘날 그 사찰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석탑만이 넓은 평지에 외롭게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탑은 충주의 상징처럼 여겨지며
주변 도로와 지명도 ‘중앙탑’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을 만큼 깊은 존재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단 아래 섬세하게 다듬어진 하층석과 7층까지 단정하게 쌓인 옥개석은
통일신라 석탑 특유의 균형감과 단아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측면 전경 (출처-국가유산포털) |
충격적인 발견, 탑 아래에서 나온 돌 하나
1978년, 석탑 해체·보수 과정에서 뜻밖의 유물이 발견됩니다.
바로 신문왕 시절에 세워진 ‘충주 신라비’.
이 비문은 통일신라의 지방관 파견, 세금 제도, 귀족 통제 정책 등
신문왕이 추진했던 강력한 중앙집권의 실체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습니다.
‘한 장의 돌비’로 시작된 이 발견은, 단순한 석탑 복원을 넘어
통일신라 정치사 전체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 결정적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출처-국가유산포털) |
석탑이 아니라 ‘정치의 상징물’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단순한 불탑이 아닙니다.
탑 아래 묻혀 있던 비문의 내용을 보면, 이곳은
국가 통치 이념을 시각화하고 신성화하는 상징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탑은 종교적 목적을 넘어
국왕의 권위와 국가 질서를 시·공간 속에 새긴 기념비적 구조물로 기능했던 셈입니다.
이는 단지 석재의 조형미를 넘어,
정치와 종교가 어떻게 하나의 형식으로 녹아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사례입니다.
탑신부 (출처-국가유산포털) |
돌은 말이 없지만, 역사를 말해준다
오늘도 이 탑은 충주의 들판 한가운데 묵묵히 서 있습니다.
사찰도, 비석도 보이지 않지만,
이 석탑을 바라보는 사람들 중 일부는 알고 있습니다.
이곳이 신문왕의 뜻이 새겨진 정치의 무대였고,
한국 고대 국가 체계의 핵심을 드러낸 유산이라는 사실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말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기록과 구조는 지금도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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